한영춘,
단국대학교 명예교수, 한국행정학회 회장
1.
머리말
영웅이
시대를 창조하고 시대는 영웅에 의해 지배된다는 말이 있다. 사실 이순신은 조선조의 가장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서 난세를 정리하여 성웅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순신은
1545년 3월 8일에 덕수 이씨가문에서 이정의 네 아들 중 셋째로 태어났다. 고향은 충남 아산시 임치면 백암리이나 본래 출생지는 서울시 종로구
간천동으로 현재의 인현동이다. 모친이 이순신을 낳을 때 꿈속에 조부인 이백록이 나타나 말하기를 “이 아이가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므로 이름을
순신이라고 작명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꿈 이야기를 남편에게 말하여 그대로 작명하였던 것이다. 또한 점치는 사람은 “이 아이가
50세가 되면 북방에서 대장이 된다”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예언이 적중하였기 때문인지 모두나 어려서부터 동네의 어린이들과 놀 때면 반듯이
진지를 만들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군사놀이에 몰두하였으며 이때마다 주변의 아이들은 이순신을 장수로 떠받들었다.
이순신이
출생하여 성장하던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환경을 고찰해 보면 그렇게 순탄한 상황이 아니었다. 즉 연산군의 폭정으로 왕실의 권위가 손상되고
있었으며 중종은 귀족계층의 정변으로 왕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인종과 명종과 같은 어린 임금과 선조와 같은 방계의 인물이 왕위를 차지함으로써
사실상 왕권은 정치에서 소외되었고 귀족계층의 권한이 강화되었던 상태이다. 그러므로 양반사회의 권력투쟁인 당쟁이 극심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양상을 감지한 이순신은 22세까지 서당에서 한문과 유학에 전념하였으나, 그 뒤부터 무술학습에 몰두하였다. 서당생활을 청산한
그는 본격적으로 장차 장군이 되기 위해 말 타기, 활쏘기, 창 쓰기, 칼 다루기 등을 배웠다. 특히 22세 때 이순신은 당시 보성지역의 군수였던
방진의 딸과 결혼을 하였는데 그의 장인 방진이 무관출신이었으므로 장인의 도움을 크게 받을 수 있었다.
이순신이
최초로 무과에 응시한 것은 28세 되던 가을이었다. 시험과목은 마술이었으므로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묘기를 발휘하였으나 도중에 낙마하여 부상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최초의 무술시험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초지를 굽히지 않고 무술시험 준비를 계속하였기 때문에 1576년 32세 때에
노력의 보답이 있어 합격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무과에
합격한 이순신이 최초로 발령 받은 지방과 직책은 함경도의 군사훈련원에 배속된 것이다. 그 다음 충청도의 병사군관을 거처 발포만호가 되었던 것인데
이때에 그의 나이가 36세였다. 근무성적이 우수하였으므로 북방지역의 오랑캐들을 방어, 공격하기 위해 조산만호와 녹둔도의 권관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자신의 상관이었던 병사 이일과의 군사상 마찰로 인하여 백의종군하는 신세가 되기도 하였다.
백의종군의
신분에서 풀려난 이순신은 45세가 되는 해의 12月에 정읍현감으로 발령되었다. 현감이란 현지방내의 행정, 사법, 군권 등을 총괄하는 권한을
장악하고 있는 기관장을 뜻한다. 그의 능력이 탁월하였기 때문에 태인 지역의 현감까지 겸임하게 되었으며 많은 업적을 쌓아 지역민들의 칭찬을
독점하였다.
다른
한편 일본은 군사력을 총동원하여 한반도에 대한 공격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감지한 조정에서는 일본의 군사력을 탐지하기 위해
황윤길과 김성일을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그 둘은 당파싸움에 휘말려 솔직한 보고를 하지 않고 오히려 일본의 무력성을 강조하였을
뿐이다.
정세변화가
심상치 않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므로 국방정책의 강화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조정에서는 정읍현감이며 종육품에 불과한 이순신을 정삼품의
전라좌수사로 발탁하였다. 그는 임지인 여수에 도착하는 즉시로 전투태세를 갖추기 위해 관할지역을 순찰한 다음 화약제조를 비롯한 여러 가지 군비와
시설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1592년 4월 15일 현재 부산지역을 공격하였으며, 이것이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이때 이순신은 24척의
선함으로 5백 척의 일본함대와 과감하게 싸워 승리하였다. 해전에서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이순신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거북선의 활용이며 둘째, 화포를 적절히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바다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국왕이었던 선조에게는 4일이 지난 11월 23일에야 보고되었다. 그러므로 선조는
12월 4일 이순신을 우의정으로 승진시키고 장례는 국장으로 치렀다. 그의 나이는 54세였으며, 현재 그의 시신은 아산시 음봉면에
묻혀있다.
2.
이순신의 개혁정신
이순신의
성품은 강직하고 공명정대하였다. 그러므로 항상 부정하고 불합리한 내용에 대하여는 결코 양보하거나 굴복하는 일이 없었다. 예를 들면 어느 날
유성용이 말하기를 이율곡이 당신의 상면을 바라고 있으므로 한번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때 이순신은
대답하기를 “현재 이율곡은 재상으로 계시는 데 만일 내가 찾아뵈면 무슨 아부나 하려는 것 같이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그만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재상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면 찾아 볼 것이다”고 하였던 것이다. 결국 이순신은 객관적 타당성이 없으면 아무리 명분이 좋은 일이라도 단호히
거절하는 성품이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출세나 명예를 위하기보다 양심에 기준 한 행동을 중요시하였다.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이순신은 확고한 개혁정신이 철두철미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정치현상이나 사회현상은 당리 당세에 따라 철저한 이기주의를
중심한 개인적 출세에만 급급한 사회,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결코 그와 같은 추악한 세속적 문화에 물들지 않고 유학의
기본사상인 인, 의, 예, 지, 신을 몸소 실천하기 위한 개혁정신으로 무장하였다. 이순신의 이러한 개혁정신을 세분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가.
‘인’ 중심의 개혁정신
맹자는
인자, 애인을 강조하였던 것인데, 이것은 어진 사람이면 모든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어진 마음이 있으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어진 마음을 가지게 되면 자연히 많은 사람과 더불어 친숙하고 친절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어질다는
‘인’의 뜻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서비스정신을 뜻하는 것이다. 서비스란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은 채 필요한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무조건
제공하는 행동이다. 만일 일정한 대가를 바란다면 서비스가 될 수 없다.
이순신은
항상 자신의 행동에서 독선적 현상이 나타나지 않도록 조심하였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직관이나 재능을 빙자하여 무리한 독선적 행동을 단행하였을 때
그것을 엄격하게 경계하였다. 다만 전승을 위한 노력만이 최선의 명제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장졸들과 협력하고 그들의 좋은 의견을 순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특히
전란으로 피난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민중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뻗치며 서비스하는 것을 하나의 사명으로 생각하였다.
난중일기의
기록을 보면 “명나라 장병들을 대접하기 위해 많은 여인들에게 떡과 음식을 가져오게 하는 관사나 관련자들을 처벌하였다”고 하였다. 당시 명조의
장병들은 전쟁보다 많은 여인들을 겁탈하는 것이 하나의 일과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떡과 음식을 갖고 오게 한 것은 여인들의 몸을 겁탈하는 결과가 되었다. 남편과 자녀들이 있는 여인들이 전란으로 몸을 버리는 억울한 현상을 겪어야
하였기 때문이다. 억울하게 참변을 본의 아니게 겪어야 하는 것이 너무나 애처로웠을 것이다. 결국 인심에 따라 대민서비스를 최대한 발휘하는 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나.
‘의’ 중심의 개혁정신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던 해인 1592년 1월 1일부터 그가 사망하기 직전인 1598년 11월 17일까지 7년 동안 계속 일기를 기록하였다. 이것이
난중일기이다. 물론 그 중에는 몇 달 며칠씩 빠진 부분이 간혹 있으나 그것은 전란으로 부득이한 결과일 것이다. 어쨌든 이순신은 최선을 다하여
전쟁과정에서 나타난 대소사를 빠짐없이 기록하려고 최선을 다하였다.
본래
지도자는 불립계층인 부하들과의 관계를 분별하여 자신의 특성이나 행동 혹은 리더십의 유형을 예리하게 분석, 고찰해야 한다. 이것은 상황적 요인에서
적합관계를 발견하기 위한 것이다. 사실 지도자의 행동에서는 선행적, 모범적 내용을 발휘함으로써 효과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을
감안한 이순신은 자신의 의식과 행동을 합리적으로 분석, 고찰하기 위해 매일 일기를 기록한 것이다.
목표,
감정, 태도, 의미 등이 각기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서 지도자로서의 상황판단 가치관이 명확해야만 합리적 의리와 표준적 행동 그리고 태도를
발휘할 수 있다. 이순신은 이러한 기본적 원리를 인식하였기 때문에 일기를 작성한 것이다. 결코 의리를 배반한다던가 사리에 부적합한 불의를 범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강하였기 때문이다.
다.
‘예’ 중심의 개혁정신
현대적
의식과 사상에서 볼 때 예의란 민주적 인권존중을 뜻한다.
모든
사람은 각기 얼굴 모양이 다르듯이 각기 다른 개성, 인격, 성격, 습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각기 상이한 현상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인권존중이란
다른 사람의 각기 다르게 표출하는 여러 가지 현상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성격이나 사고방식과 다르다고 무조건
경멸하고 무자비하게 비판하였다면 그것은 곧 인권을 모독하는 결과가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전통적 예의는 자녀들이나 젊은 사람 혹은 연령이나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무조건 맹종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자연히 관료제적 계층의식이 형성되었으며, 이것을 당연한 현상적 결과로
인식하였다.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다음 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왜 함대의 133척을 무찌르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전승의 기쁨보다
전쟁과정에서 부상당한 장병들의 생명보전과 그들의 치료문제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의 상처를 일일이 어루만지며 완치를 기원하였으며 그들의 정신적
상처를 쓰다듬어 주었다. 또한 6년 동안의 전쟁 중 헐벗고 굶주림에 시달리는 일반백성들에게 식량을 제공하기 위해 소금을 굽고 바닷물고기를 잡는
역할을 직접 수행하였다. 전쟁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무가치한 존재들이지만 그들을 버리지 않고 생명을 건져주기 위해 직접 노력한 것은 인권을
존중하는 예의심이 강하였기 때문이다.
라.
‘지’ 중심의 개혁정신
‘지’란
스스로 깨달아 지혜롭게 이해하고 그것을 지혜롭게 행동화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분수를 알아야하고 그 분수에 따라 행동화할 수 있는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지각하는 것이다.
본래
개인의 사회적 역할이란 일정한 조직 내에서 일정한 위치와 연결시켜 기대되는 바의 일정한 행동을 뜻한다. 그러나 기대되는 역할과 전혀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역할인이 자신의 위상을 망각한 역할 수행과정에서의 능력문제 그리고 환경적 요인 등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역할에 대한 지각,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의 지각, 그리고 환경적 요인을 정확하게 분석, 고찰한 다음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지각하는 것 등이 필요하다.
이순신은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기 위한 지혜를 습득하기 위해 최선을 기울였다. 그러므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유능한 인재가 되려고 노력하였으며,
일정한 원칙과 기본적 자세를 유지할 뿐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역할을 해야겠다는 각오를 굳게 다짐하였다. 그는 우선 참다운
무인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병학을 연구하였을 뿐 아니라 국민으로서의 생활권과 가치관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순신이 활쏘기 연습을 계속 할 때에 항상 남쪽을 향하여 화살을 날렸다. 이것을 유심히 바라본 사람이 왜 남쪽으로만 화살을 쏘느냐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북부는 서울지역으로서 국왕이 계시는 곳이므로 국왕을 향해 활을 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민이 국왕에 대한
충성심을 나타내는 행동과 역할을 뜻하는 것이다. 결국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국가관이 얼마나 투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충성심과 국가관을
모든 장병들과 백성들 앞에서 직접 실천하는 역할을 실천하였다.
마.
‘신’ 중심의 개혁정신
‘신’이란
인간관계과정에서 전개되는 신의를 뜻한다. 사실 대인관계의 본질은 상호작용적관계이다. 상호작용을 위해서는 상호 간에 신의가 있어야 하고 신의를
중심으로 상호 간의 존재를 인정할 뿐 아니라 상호 간의 행동을 조정해야 한다. 결국 교과적 성과를 이룩할 수 있고 기탄없는 대화가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세상만사는 한 사람의 독단적 사고나 행동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과 숨김없는 상호작용이 가능해야 한다. 또한
상호작용을 위해서는 상호 간의 신의가 전제조건이 된다.
이순신은
말하기를 “살려고 하면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하면 반드시 산다”고 하였다. 즉, 신의가 없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고 신의가 있으면 반드시 살
것이라는 뜻이다. 결국 신의로서 진충보국을 통한 영생을 강조한 것이다. 사실 이순신은 원균의 모략에 따라 한때 백의종군하였으나 재 등용 되는
영광을 차지할 수 있었다. 특히 이순신은 가족에 대한 신의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전장에서 부모님들의 사망소식을 들었으나 장례식에 직접 참석할
수 없으므로 부모의 은덕을 높이기 위해 사모곡을 작성하여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나라의 치욕을 씻도록 하라.”고 교훈 하시던
어머님과의 신의를 준수하기 위해 백의종군 하였으며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며 최선을 다하였던 것이다.
3.
현대적 의의
이순신의
개혁정신을 현대적 사상이나 의식으로 분석, 고찰하였을 때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즉 현대 민주사상의 중심이 되는 인권존중,
공익성의 보편화 및 공의를 위한 개인의 희생 등이다.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가.
민주적 인권 존중
이순신은
항상 중정, 중용, 조화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강조하고 대변하였다. 그는 일정한 직위에 있을 때나 백의종군할 때 나를 불문하고 항상 전 사병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이해하고 위로하였으며, 특히 부상으로 죽음을 앞둔 사병들에게 따뜻한 인간애를 베푸는 일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인간애의 발로는
평소에 모든 장졸들의 의견을 수합하여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 지휘관들과 장졸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평가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 방책이라고 인식하였다.
결국
이순신은 인간을 불공평하게 차별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권리를 존중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순신은 현대적 인권존중 사상을 가장 높이 숭상한 민주적 지도자였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전시 중에도 피난민들의 생계를 크게 염려하여 그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방안을 다각적으로 강구하여 슬기로운 대책을 강구하였다.
사실
군부의 총 지도자로서 전승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과업이었으나 전승 자체도 실제 백성들의 인권존중을 위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피난민들의
생계보장이나 생명의 위협을 제거하려는 활동과 대책을 다각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과 대책에 대한 증빙자료는 전란 중 국왕에게 보내는
상소문의 내용을 보아 알 수 있다. 즉 “피난민들이 돌산도로 들어가 살면서 농사를 짓도록 명령해 주시기를 청하는 상소문”을 국왕에게 올렸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의 피난민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므로 그들의 생계문제가 무엇보다 중요한 급선무였을 것이다. 이순신에게 인권존중
사상이 없었다면 백성들의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하였을 것이고 또한 피난민들의 생계문제에 무관심하였을 것이다.
나.
공익성의 강조
공익성이란
개인이익과 사회적 공공이익 중에서 후자의 이익을 뜻한다. 그러므로 개인의 이익보다 공공이익을 우선하는 것이다 또한 공사관계를 정확히 구분하여
사적 관계보다 공적 요소를 최우선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공익성이란 전 국민들이 공유화 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어떻게 행동해야만 공익성을 위한 것인가를 전 국민이 지각해야 한다.
이순신은
자신이 기록한 난중일기에서 공익성과 공의성을 행동화하는 내용을 다양하게 표현하였다. 우선 공익성을 위한 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즉
“순찰사의 편지에 의하면 통역관들이 뇌물을 받고 무고한 내용을 보고하였으며, 이러한 행동은 가장 흉악한 행동이기 때문에 용서 할 수 없다.”는
기록이 있다.
결국
순찰사들이 사리사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뇌물을 받음으로써 국가이익을 손상시킨 내용에 대한 비판하며 탄식하는 것이다. 당시의 공직자들이 공익성을
소홀히 하고 사리사욕에만 골몰하는 행동과 태도에 대해 비판한 것이다.
이순신이
여수에 갔을 때 모든 장병들이 사적인 고난을 극복하고 전시 태세에 골몰하고 있는 현상을 바라보며 기뻐하며 말하기를 “모든 장병들이 자신들에 대한
걱정을 잊어버리고 다만 전쟁을 위해 격동되어 있더라”고 칭찬하였다. 이것은 모든 장병들이 사익을 저버리고 국가적 공익을 위해 헌신하는 태도를
보고 칭찬한 내용이다. 결국 대소사가 동시에 겹쳤을 때에는 대사를 우선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공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밖에 공익성을 강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말과 행동으로 표현한 내용들이 많다. 예를 들면 피난민들이 소와 재물을 도둑질하기 위해 적군이
쳐들어온다는 거짓소문을 퍼뜨렸을 때 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한 것, 좌의정 김응남이 개인적인 우정에 따라 김억추를 국방책임자로 임명하였을 때
김응남이 공익성을 무시하고 사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인사행정을 단행하였으므로 이것을 탄식하면 울분을 참지 못한 것 등의 사건들이다.
이순신은
공적 국익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하므로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사실 공익성을 우선하는 것은 인간적 양심의 발로이다.
또한 이것은 유교의 인, 의, 예, 지, 신의 한 부분으로서 현대적 의의로 해석하면 공익성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다.
공의성의 확대
유교의
기본적 도의정신은 도의적 원리와 역사관을 정립한 기반을 중심으로 하는 주도정치의 실현을 강조한 내용이다. 결국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생활의 중심이 의리와 도의에 기준 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의충효와 같은 유교의 실천정신을 기반으로 제도화된 교육적 성과를
거두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현대적 의의에 따라 공의성이라고 설명 할 수 있다.
본래
‘의’는 “마땅한 것으로 어진 사람을 높이는 것이 큰 것이다.”라는 말로 해석된다. 결국 정당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을 높이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공의는 가장 합리적이고 객관성이 있는 사고방식과 행동으로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자세를 뜻한다. 그러나 왕도정치에서
국왕에게만 충의를 다하던 것과는 달리 계층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의를 나타내야 한다.
국가나
조직체의 목표설정이나 사상결정 그리고 문제의 인식, 대체안의 설정, 업무처리결과의 평가, 등의 제 과정에서 독선적, 독단적 비판이나 평가는
용납할 수 없으며 다만 공의성에 기준한 합리성과 객관성이 전제조건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공의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주관성이나 인격성을
희생해야 한다. 결국 전체의 이익과 발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어느
날 이순신은 직접 군인들이 소지하고 있는 무기를 검열하였던 결과 “헐어서 볼꼴 없는 무기들이 많으므로 담당자들을 처벌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사실 군인들의 무기는 자신들의 생명선과 같으며 또한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공의성의 지표와 같은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귀중한
물체를 소홀히 하였고 방치하였기 때문에 중형으로 다스렸던 것이다.
다른
한편 경상도의 동래와 양산에서 전투가 시작되었으나 곧 패전하였다. 이 때에 경상좌병사인 이각과 좌수사인 박홍이 싸워보지도 않고 철수하였으며 또한
순천의 영군병방은 근방에 있었으면서도 출병하기 않고 패전과정을 관망하기만 하였다. 그러므로 이순신은 관계자들은 무참하게 처벌하였다.
물론
패전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참전한다는 것은 전략상 무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싸워보지도 않고 무조건 패전한다고 단정한다는 것은
군인정신에 위배될 뿐 아니라 국가관을 확립해야할 공의성이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이순신은 단호하게 관계자들을 처벌한 것이다. 결국 자신의
생명만을 중요시하였을 뿐 국가의 존립문제를 소홀히 하였기 때문이다.
그
밖에 각 지역의 수군 장졸이 왜군의 소식을 듣고 싸워보지도 않은 채 겁에 질려 있는 것을 본 이순신은 그 때마다 군기확립과 공의성의 확대를 위해
엄격한 통제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므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라.
효과적 리더십의 발휘
리더십이란
지도자의 목표지향행동, 과업지향행동, 업무중심행동 등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여 조직의 존속과 발전을 이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부하들과
조직구성원들에게 목표를 제시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기술적 지도를 합리적으로 전개해야 한다. 따라서 설정된 목표를 적극적으로 달성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 결국 리더십의 성공여부는 목표달성의 관점에서 평가하게 된다.
효과적
리더십은 전 구성원들의 상호대립적 선호성과 욕구를 조정하여 통합시키는 역할을 수행해야 할 뿐 아니라 그 둘의 상이한 선호성과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새로운 활동영역을 개발, 창출하여 조직자체를 어려움 없이 계속 존속,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직 내의 제 요소를 조정, 정리해야 할
뿐 아니라 조직 환경을 유용한 상태로 변화시키는 역할이 필요하다.
이순신은
전란 중 부상병과 파괴된 전진기지 및 무기의 조달과 수선 등 다양한 군무가 겹쳐 있음에도 불구하고 효과적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우선
이 순신은 1) 군비정돈과 조달 2) 전투준비와 장병들의 사기조성 3) 부족한 전투 병력의 보충 4)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각 지역을 순회하며
승려와 농민들에게 접근하였던 것 5)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는 피난민들에 대한 구호책의 실시와 생활터전의 형성 등을 위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특히 불도에만 전념하는 승려들에게 전의를 불러 일으켜 승병부대를 편성하고 직접 전투에 참가케 하는 작업은 특출한 리더십이 없는 한 불가능한
것이다.
살생을
금지하는 것이 불교의 교리이나 그 교리를 벗어나 살생을 위한 전투에 참여 할 수 있도록 승병부대를 편성하게 하였다는 점에서 볼 때 이순신의
리더십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현실적
환경과 전혀 다른 목표, 욕구, 사고, 감정, 의미 및 가치 등을 지니고 있으면서 불교교리 중심의 의사결정을 전개하기 쉬운 승려들을 전투에
참가하도록 조정, 통합하여 국가의 목표인 전승을 이룩하도록 하였다는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이순신의 효과적 리더십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4.
결론
이순신의
생활사, 개혁정신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훌륭한 업적을 살펴볼 뿐만 아니라 그의 인간적 가치관, 국가관, 및 역사관 등이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따라서 그의 개혁정신에서는 새로운 진리를 찾아냄으로서 현대적 의의를 부여한 다음 현대 사회과학분야와 비교해야
한다.
사실
이순신은 조선조의 역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명장이었으므로 만일 그가 없었다면 임진왜란이 어떠한 결과로 종결되었을 것인가? 또한 조선조의 운명과
한반도의 역사는 어떻게 장식되었을 것인가의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는 의롭고 용맹스러웠으며 또한 지혜로운 학문을 겸비한 명장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남긴 유무형의 학문적 유산인 개혁정신을 현대인의 생활 철학적 길잡이가 되도록 해야 한다. 변화무쌍한 현대인의 생활 속에는 일정한 생활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젊은이들은 전통적 학문에 기준한 생활철학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어 연구자체를 소홀히 할 뿐 아니라 하나의 골동품으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서양철학만을 숭상하며 그 방법에 의존하고 있다. 만일 현재의 학문적 추세가 계속될 경우 우리의 전통적 역사의식이 소멸될 뿐
아니라 역사성이 없는 민족사로 연결될 위험이 따르게 된다.
본래
이순신은 유교학문을 중심으로 기초를 닦았으며 특히 인, 의, 예, 지, 신을 중심 한 생활철학을 실천하는 생활로 일관하였다. 국토방위를 위한
장군이 되기 전에 먼저 진실한 인간이 되는 것을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인, 의, 예, 지, 신이란 인간이 준수해야 할 유교적 양심이다.
이러한 양심적 생활철학을 생활화하였기 때문에 국가관이 정확하였고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였으며 또한 공익성과 공의성을 위해 개인적이고 사리사욕이나
개인적 명예추구를 과소평가하였다. 개인적으로 많은 중상모략을 받아 백의종군하는 신세가 되었을 때에도 아무런 불평 없이 국가에 대한 충성을 소홀히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순신의
생활철학을 현대적 의의에 따라 해석하면 1) 모든 인간을 차별 없이 공평하게 존중하는 것 2) 공의성을 위해 사리사욕을 저버리는 것 3)
공의성을 위해 개인적 제 요소를 희생하는 것 등이다. 그러므로 유교의 인, 의, 예, 지, 신 등을 현대적 의의에 기준하면 공공성,
공익성 및 공의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문제점은 철저한 이기주의에 빠져 인간성 자체가 소멸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비양심적 생활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현대인은 이순신의 생활철학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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